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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크레타 사람들은 거짓말쟁이다

씨리

   씨시니우스는 매사에 신중한 사람이었으니 평소라면 공유택시 같은 건 생각도 안 해 봤을 것이다. 성수기 크레타의 복작복작한 관광인구를 타깃 삼은 ‘헤르메스’는 빠르게 성장했지만 그만큼 검증 안 된 운전자들의 범죄로 유명했다. 하지만 거리는 싸늘할 정도로 인적이 드물었고 버스는 40분에 한 대식 온다. 겨울철의 해수욕장은 모래벌판에 불과했으니까. 지금 같은 저녁은 도시라면 러시아워인데도 차도는 한적했다.

하하, 겨울엔 여기 볼 거 한 개도 없어요. 여름에 오시지, 호텔비는 지금의 여섯 배겠지만….”

   동글동글한 흰색 소형차 하나가 숙소 앞으로 도착했다. 기사는 씨시니우스보다 열 살은 어려 보이는 키 작은 여자였는데, 그 역시 자기 차처럼 동글동글했다. 씨시니우스는 에피메니데스 박물관으로 가 달라고 주문했다. 숙소는 도심지에 있었고 박물관은 현자 에피메니데스가 57년 동안 잠을 잤다고 전해지는 동굴에 있었다. 기사는 씨시니우스가 거기로 간다고 하자마자 요상한 옷 입고 있는 밀랍 인형밖에 없다면서 다른 관광 스팟을 줄줄 읊으며 오지랖을 부렸다. 확실히 그는 씨시니우스를 알아보지 못했다. 국제뉴스에는 관심이 없었는지 한때 텔레비전에 개근하던 정치인을 보고 하는 말이라고는 고작,

“아저씨 로마인이죠? 크레타 사람처럼 입으셔도 발음에서 확 티가 난다니까. 근데 현지인인 척은 왜 한 거예요? 그런다고 시장에서 바가지 안 쓰는 거 아니에요.”

   밖에 없었다. 기사는 자기가 떠드는 것의 반의반 밖에 물어보지 않았지만, 그래도 씨시니우스는 신상을 제법 많이 날조해야 했다. 그는 자기 이름이 리키니우스라고 말했고, 심리학 전공에 딸만 둘 있고 첫째는 구청에 다니고 있으며 터울이 큰 둘째는 예고에서 애니메이션을 배우고 있다는 얘기를 술술 지어냈다. 거짓말할 때 절대 거짓말하지 않을 사람 같은 침착함을 지키는 재능은 예전에 씨시니우스가 로마 평민의 대표자로 선출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기사는 씨시니우스의 말을 믿고 안 믿고 할 것도 없이 전혀 경청하지 않는 듯했다. 그는 자기 할 말만 일방적으로 쏟아내지 않기 위해 도의적으로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기사는 씨시니우스의 있지도 않은 딸들에 대한 얘기에 건성으로 반응했고, 부인은 어떤 사람이냐는 물음도 딱 그 정도의 건성으로 던졌다.

 

“철학자입니다.”

 

그 말에 기사는 좀 흥미를 보였다.

 

“제가 이래 봬도 로마 철학 전공했는데, 혹시 아는 사람 아닐까요? 철학자면 교수겠죠?”

 

   씨시니우스는 아내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침묵했고 기사도 더 캐묻지 않았다. 침묵이 이어질 틈을 허락하지 않고 기사는 다시 발랄하게 물어보았다.

 

“그런데 가정도 있으신 분이 이런 휴양지에는 왜 오셨을까?”

 

   마침내 기사는 핵심을 건드렸다. 씨시니우스가 크레타에 온 이유, 처음부터 기사가 궁금했던 것은 그것이었다. 앞서 보인 모든 무심한 태도는 이 질문도 별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 위장하려던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일종의 워밍업. 물론 기사는 씨시니우스가 처음엔 거짓말하거나 둘러대리라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유도신문이라면 통달한 지 오래였고, 결국 씨시니우스는 실토하게 될 것 역시 알았다. 비밀 요원으로 일한 지도 벌써 팔 년이다. 실패한 임무는 없었다. 이번 추적은 우여곡절이 좀 있긴 했지만, 결국 타깃, 로마의 추방자를 이 차 안에 가둬 두지 않았는가. 커다란 맥가이버칼 같은 이 자동차에서 목표를 암살하고 사고로 위장할 방법은 플랜 H까지 있다. 하지만 석연치 않은 구석이 한둘이 아니었다. 처음 씨시니우스를 따라 크레타에 도착했을 때에는 망명 루트 알선책이 여기로 불렀다고 생각했다. 그건 앞뒤가 안 맞았는데, 망명국이 목적지였다면 여러모로 더 혼잡하고 더 선택지가 많은 아테네가 적절하기 때문이다. 본부는 씨시니우스가 크레타에서 틀림없이 더 큰 조직과 접선할 거라고 예측하여 소위 ‘일망타진’을 위해 당분간 씨시니우스의 일거수일투족을 추적하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씨시니우스는 경계하거나 숙소를 옮기지도 않았고, 관광이라도 하는 것처럼 미술관이나 쏘다녔다. 왜 하필 크레타인가?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출장 온 건가요? 관광, 뭐 그쪽 직업이신가?”

 

   기사가 작업에 슬슬 시동을 걸 때쯤, 씨시니우스는 크레타의 변두리로 갈수록 한적해지는 해변 고속도로의 차창 밖에서 몰아치는 파도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는 느끼한 로마 영화 남자주인공 대사 같은 말을 했다.

 

“아마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겠죠.”

 

   기사는 자기가 미인계로 뽑힌 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무해하고 친근한 인상이 장점인 스파이가 주접떠는 택시 기사를 연기했는데 갑자기 그런 식으로 넘어올 리 없었다. 하지만 그는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배워둔 유혹당한 타깃에 대응하는 매뉴얼을 읊었다. 상대가 대통령이든 국방부 장관이든 할 것 없이 모든 매뉴얼은 이 한마디로 시작했다.

 

“하지만 당신은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

 

 씨시니우스는 고쳐 말했다.

“날 죽일 사람을 만나러 왔습니다.”

 

여전히 시선은 바다에 고정한 채.

 

*

   언제나 중요한 건 타이밍이다. 요원은 계속 기사인 척한다면 그 타이밍을 놓치리라고 생각했다. 이미 타깃은 자신의 정체에 대해 확신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그렇다면 이제는 쓸모 없어진 배역은 버리는 게 맞았다.

 

“역시 감이 좋으시네요. 로마 국경을 경호 없이 뚫으신 분이잖아요. 브린디시 항부터 이구메니차 항까지 화물칸에서 8시간을 버티고, 코린토스만을 보트 하나로 건넌 사람인데. 아테네에서 스파이 다섯 명을 따돌리기도 하셨죠. 그런 분이 절 몰라볼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씨시니우스 벨루투스, 잘 생각해 보세요. 평생 추격전이라고는 해 본 적 없는 행정직 공무원이 어떻게 7주씩이나 로마 정보국의 눈을 피할 수 있었을까요?”

   

시니우스는 오래 말을 않았다. 그러나 요원이 보채기 전에는 대꾸했다.

“목적이 있었습니다. 유일한 목적이어서 실패할 수 없었습니다.”

 

요원은 크게 웃었다.

 

“사람 일이 바라는 대로만 되지는 않아요. 은밀한 조력자가 있다면 모를까! 절 못 믿으시는 것도 당연하죠. 정치적 망명자가 누굴 믿겠어요. 일단은 제가 헬라스 측 사람이라는 것만 알아 두세요. 당신을 살려두고 싶어 하는 저 위의 분들 때문에 지금까지 뒤에서 로마 스파이를 청소해 왔다는 노고도 좀 알아 주시고.”

 

씨시니우스는 믿지 않는 눈치였다.

 

“제게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주려는 생각입니까?”

 

요원은 말했다.

 

“모든 추방자가 죽지는 않아요. 하지만 당신은 전략을 잘못 세웠어요.”

 

“무슨 전략?”

 

“크레타로 온 것 말이에요. 아테네의 항구까지 가는 건 좋았어요, 거기선 어디든 갈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왜 하필 크레타예요? 잠깐 거쳐 가는 길목인 줄 알았는데, 지금 열흘째 눌러앉아 있잖아요. 여기서는 완전히 고립될 거예요. 외딴섬이라고 생각한 건지, 앞으로의 여생을 낭만적인 바다에서 보내려고 생각한 건진 모르겠지만 이건 잘못된 선택이에요. 이런 조언을 해 주려고 원래대로라면 누가 알아 주길 바랄 수 없는 일을 하는 제가 이렇게 직접 모습을 드러낸 거고.”

 

   제법 그럴싸한 거짓말이지만 요원은 타깃이 그렇게 쉽게 넘어가지는 않을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씨시니우스가 요원의 말을 듣고 꺼낸 한 마디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뜬금없는 것이라 팔 년 차 특수요원마저 당황하게 했다.

“어떤 부고는 뉴스로 전해집니다. 그래서 저는 크레타로 왔습니다.”

 

*

   리시스트라테는 철학으로 박사를 밟고 있는 무기상의 딸이다. 씨시니우스는 자신의 약혼자를 남들에게 그런 식으로 소개했다. 그의 진한 립스틱은 왕정 시대에는 아직 유행이라 어색해 보이지는 않았으나, 굵은 뿔테 안경은 그 시대에도 뒤떨어진 것이다. 씨시니우스는 자신의 약혼자를 그런 식으로 기억했다.

 

   18년 전이다. 그들은 약혼반지를 주고받는 날에 명함을 주고받았다. 씨시니우스는 리시스트라테의 이름뿐 아니라 그의 가문이 아테네의 유서 깊은 군수 기업을 이끌고 있다는 것을, 리시스트라테의 아버지가 승계 서열 싸움에서 밀려 방황하다 로마에 정착했다는 것을, 그러고 나서 어떻게든 새 국가에서 시작할 만한 정통성을 찾을 필요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때문에 모든 면에서 그 가문보다 급이 떨어지지만 로마의 공공 건축을 종종 맡는 자신의 가문과 연결될 필요가 있었다는 것 역시 미리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명함을 받는 순간 “지금부터 당신에 대해 차차 알아가고 싶습니다”라고 입에 발린 소리를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리시스트라테는 박사도 마치지 않았으나 이미 대중적 문필가였다. 석사 시절에 쓴 글이 단행본으로 발행되었고, 묘하게 반체제적으로 읽힐 수 있는 구석이 있어 시대 분위기를 타고 어마어마하게 팔렸다. 반면 씨시니우스는 아직 브루투스 같은 거물이 연설하기 전에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해 내보내는 풋내기 운동가에 불과했다. 그는 학생회 출신도 아니었다. 대학 시절 그는 나중에 낙하산으로 집안 회사에서 행정직이나 맡게 될 것을 알았음에도 설계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전공 실기에 뼈를 묻었던 건축학도였다. 그러다 교묘한 법체계가 벽돌 세금에 장난을 치고 있다는 걸 발견했고, 그것을 계기로 폭군 타르퀴니우스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의 푼돈을 짜내서 독차지했다고 목소리를 좀 냈다. 어쩌다 보니 그는 브루투스의 대변인 행정실에서 막내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몇몇 의제 앞에서 ‘일단은’, ‘우선은’, ‘지금은’ 같은 말을 자주 쓰는, 결국은 귀족 출신인 동료들 사이에서 늘 불만이었고, 그래서 언제나 일정량의 외로움을 양심처럼 간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사랑에 빠져야겠다는 결심까지는 아니었어도, 시민 동지로서 어쩌면 리시스트라테와 정을 붙이고 살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리시스트라테를 처음 만나러 고급 레스토랑으로 갔다. 그는 더 먼저 오는 쪽이었고, 더 먼저 말하는 쪽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리시스트라테 씨.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사실 그 이상이죠, 부끄럽지만 제 연설에 자주 인용합니다.”

 

리시스트라테는 약속 시간에서 이 분 정도 늦었는데, 그 정도는 사과할 만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제 글에 관심 가져 주셔서 감사해요. 하지만 정치적으로 인용되기엔 좀 학술적인 글일 텐데…. 제가 마케팅을 위해서 신화를 주제로 첫 저서를 쓴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됐죠. 모두 신화는 쉬운 이야기라고 생각하니까. 물론 씨시니우스 선생님은 제 글을 다르게 이해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에요.”

 

씨시니우스는 리시스트라테가 전형적인 에고가 강한 학자 타입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하고 잘 지내는 타입은 아니겠구나. 하지만 로마 시청 재건축 입찰 경쟁보다 어렵게 맺어진 혼사였고 배우자와의 성격 차이 정도는 사소한 문제였다. 그는 능란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이것이 토론이 아니라 대화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혹시 사람들이 선생님의 책을 곡해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특히 정치적인 사람들이?”

 

리시스트라테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그는 쉽게 말하려고 최대한 애를 썼다.

 

“제 논문은 언어의 발생에 대한 것이고, 헬라스의 스핑크스 신화에서 그것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모티프를 찾았기 때문에 그것을 기반 텍스트로 택했어요. 제가 쓸 수 있는 가장 학술적이고 정확한 언어였죠. 그러나 사람들은 테베를 억압하던 스핑크스의 죽음을 다룬 부분을 혁명으로 해석하는데, 저는 스핑크스의 죽음을 긍정적인 의미로 쓴 게 아니에요.”

씨시니우스는 리시스트라테에게서 약간의 적대감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대답에 아첨을 약간 섞었다.

 

“아마 그것이 언어의 한계 아닐까 싶습니다. 언어를 주제로 첫 논문을 쓰신 분이니 거기에 대해서는 아마 로마에서 제일 잘 아시겠죠.”

 

리시스트라테에게 그 칭찬이 먹혔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좋아하는 주제가 나와 그의 말투에 약간의 열정이 붙기 시작했다.

 

“언어의 발명은 곧 오해와 모순, 무엇보다 거짓말의 발명이죠. 박사 논문은 거기에 관해 쓸 생각이에요. 에피메니데스의 역설에 대해 들어 봤어요?”

 

씨시니우스는 에피메니데스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다. 그러나 그는 약혼자 앞에서 허세를 부렸다.

 

“들어 본 것 같은데….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알 것 같습니다.”

 

“아마 아실 거예요, 대중적으로 유명한 모순 중 하나니까. 모든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다. 들어 봤어요?”

 

씨시니우스는 물론 그 말을 처음 들어 본다. 그래서 그는 다소 멍청하게 대답했다.

 

“그게 왜 모순입니까?”

 

리시스트라테는 자기 연구 주제에 대해 대화가 이어지니 기분이 들떠 씨시니우스의 허세가 들통난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 말을 크레타인이 하니까요.”

 

씨시니우스는 그 모순을 이해하느라 약간 시간이 걸렸지만, 리시스트라테는 해설해 주지 않고 그를 기다려 주었다. 그가 알았다는 듯한 탄성을 내지르자 리시스트라테는 말들을 쏟아냈다.

 

“결국. ‘모든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다’라는 말은 ‘이 말을 하는 사람이 크레타인이다’라는 전제가 있을 때 논리학적으로 모순이 되죠. 제가 흥미를 느낀 부분은, ‘모든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다’가 논리적 명제임은 분명하지만, ‘화자’가 ‘크레타인’이라는 것은 단순히 논리학의 영역에서 규정하기 쉽지 않다는 데 있어요. 문화와 기억, 경험, 관습들이 그것을 규정하죠. 예를 들어, 아주 어릴 때 크레타를 떠나 자신이 크레타인이라는 정체성이 없지만 호적에는 크레타인이라고 적힌 사람이 “모든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쳐요. 그렇다면 이 모순에 대한 논의는 연역적 추론만으로는 풀 수 없어요. 그러니까, 기존의 논리학은 결코 세계에서 분리될 수 없는 거죠….”

 

   리시스트라테의 말은 그 이후로도 길게 이어졌으나 거기서부터 씨시니우스는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모든 말이 끝나고 요약하듯 한 마디를 겨우 꺼냈다.

“그러면, 당신 말대로라면 언어는 다분히 정치적이군요.”

 

리시스트라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서 저는 논리학이 개량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언어의 정치성은 오류와 모순이라는 치명적 한계로 귀결되니까요. 우리는 더 정확하게 말하기 위해 새로운 언어를 쓸 필요가 있어요.”

씨시니우스는 약간 언짢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글쎄요, 정치적 언어는 오히려 가능성 아닐까요? 세상을 어떠한 틀에서 해석할지 열려 있는 언어는, 곧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에 대한 것이기도 하니까 말입니다.”

리시스트라테는 갑자기 알았다는 듯한 투로, 약간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 생각으로 제 글을 연설에 인용한 건가요?”

 

씨시니우스는 그가 자신이 철학 전공자로서는 무식하게 들리는 말을 해서 비웃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다소 짜증을 섞어 대답했다.

 

“그게 그렇게 신경 쓰이신다면 앞으로는 안 하겠습니다.”

 

그 뒤로 대화는 잘 이어지지 않고 계속 끊어졌다. 마침내 씨시니우스가 정당 회의 핑계를 대며 먼저 자리를 떴고, 리시스트라테도 학회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당 회의와 학회, 둘 중 하나도 실제로 열리지 않았을 것이다. 두 사람은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헤어지면서 다음 만남을 기대하고 있다는 얘기를 빼놓지 않았고, 그러는 모습은 다정한 연인보다는 비즈니스 파트너처럼 보였다.

 

*

그 후로 석 달이 지났다. 씨시니우스는 한적한 카페에서 리시스트라테를 기다렸다. 불편한 자리였지만 피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리시스트라테 쪽에서 먼저 ‘데이트’를 요청하는 일은 매우 드물었으니. 그리고 질질 끈다고 올 것이 안 오는 건 아니다. 씨시니우스는 사흘 전 승전 연설 중 첫 만남 때 다시는 그의 글을 인용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후로 처음으로 리시스트라테를 인용했다. 그것 아니면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이번에는 목적이 달랐다. 타르퀴니우스는 물러났으나 씨시니우스는 슬슬 다음을 생각해야 했다. 그 ‘다음’이라 함은 ‘다음’의 적, 그러니까 귀족들이었다. 이제 그는 브루투스의 정당에서 슬슬 벗어나, 구체적으로 그게 무엇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평민의 세력을 대변하는 사람, 아마 건설노조의 위원장 같은 것이 되어야 했다. 그런데 정략결혼으로 가정을 꾸렸다는 사실은 어느 모로 보나 평민들의 지지를 얻는 데 걸림돌이 되었다. 안 그래도 씨시니우스의 가문은 재건축을 명목으로 빈민촌을 철거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기 때문에, 자신이 ‘우리 중 하나’가 아니라 ‘그들’이라는 이미지가 더 강해지면 불리했다. 씨시니우스는 고심하다 자신이 저 외국계 명문가 따님과 로맨틱한 관계가 될 만한 구실을 찾았고, 예전에 그의 저서를 자주 인용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제가 첫 저서를 공화 혁명을 위해 썼다고 하셨죠. 아주 얼굴이 벌게져서 소리치더군요. ‘모든 무지로부터 해방’은 권력자의 세뇌에서 벗어나자는 뜻이라고도 하셨고…. 사람들이 제 글에 그렇게까지 흥분할 줄은 몰랐어요, 당신이 그렇게 구세주라도 된 것처럼 보일 줄도 몰랐고….”

 

씨시니우스는 긴장한 채로 대답했다.

 

“제가 연설했던 자리에 있었습니까?”

 

리시스트라테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생략하고 말했다.

 

”당신은, 또 이런 글을 쓴 사람과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고….”

 

그 말을 리시스트라테가 문제 삼을 것에 대비하기라도 한 듯 씨시니우스는 그의 말을 잘랐다.

 

“모르셨습니까, 원래 모든 정치인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리시스트라테는 뭐라고 대꾸하지도 않고 한참을 씨시니우스의 시선을 피하며 있었다. 씨시니우스는 자기가 대신 말하려고 했을 때 뒤늦게 입을 연 리시스트라테와 겹쳤다.

“저는,”

 

리시스트라테가 고개를 푹 숙였지만 씨시니우스는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운동가들이 연설에서 제 저서를 인용하는 걸, 그냥 교수 임용에 정치색 있는 사람은 불리할 것 같아서 싫어했던 것 같아요. 아니, 무서워한 거죠, 비겁하게. 로마 교수의 80%는 귀족이고, 심지어 팔라티노 대학에 평민 출신 교수는 한 명도 없으니까.”

씨시니우스는 당최 영문을 모를 말들이었다. 그게 대체 이 일과 무슨 상관이냐고 묻는 씨시니우스에게 리시스트라테는 대답했다.

 

“왕정에 대한 불만들은 은유로 감추고 모두에게 그런 의도로 쓰인 게 아니라고 말했죠. 결국은 그런 식으로 나 자신도 속인 거고. 예전부터 이런 생각을 자주 했어요. 당신의 연설 영상을 당신보다 먼저 만났을 때부터 말이에요. 저는, 이런 말들을 고백하고 싶어서 당신을 불렀어요. 아니,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영원히 책벌레들이나 밑줄 치면서 읽을 제 글을 세계에 돌려준 당신에게 고맙다고 하고 싶었어요. 그건 좀 아름다운 순간이었고. 사실은, 진짜로 하고 싶었던 말은 어쩌면 제가 당신을….”

 

리시스트라테는 멈췄던 말을 삼키고 다른 문장으로 끝을 맺었다.

 

“모든 정치인은 거짓말쟁이라고 하셨죠. 저는 그 말이 모순이었으면 좋겠어요.”

 

   이번에도 리시스트라테는 씨시니우스가 그 말을 이해할 때까지 사이를 줬다. 그러나 씨시니우스는 ‘그렇습니까?’, 하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로 시간을 벌 궁리를 해낼 때까지도 한참 걸렸다. 잔뜩 당황하여 그 능변의 혀가 굳어 버렸다. 마침내 그는 연주회에 늦지 않게 도착하려면 지금 일어서야 한다고 말을 돌릴 거리를 찾아냈다. 그는 차분한 말투로 맥락 없는 말들을 늘어놓았다. 티켓을 얼마나 어렵게 구했는지 모를 겁니다, 당신이 교향곡을 좋아했었나요 콘체르토를 좋아했었나요, 저는 사람들이 해외의 순회공연을 추종하는 만큼 로마시향을 눈여겨봐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는 운전하면서도 여백을 허용하지 않고 말들을 쏟아냈다. 리시스트라테는 ‘네’, ‘그래요’, ‘아니요’ 말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연주가 끝났을 때 리시스트라테는 코끝이 빨개져서 조금 울고 있었다. 씨시니우스는 음악 듣는 귀가 그리 밝지 않아 정말로 이 연주가 그렇게 감동할 정도였는지는 몰랐지만, 그래도 이 저녁에 리시스트라테가 만족했다고 생각해서 안도했다. 그러나 그는 잠이 들기 전에, 문득 왜 리시스트라테가 연주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는데도 기립하지 않았는지 궁금해졌다.

 

*

왕이 물러났으니 이제 그들은 마침내 혁명 때문에 미뤄 두었던 결혼식을 치른다. 완벽을 추구하는 신혼부부에게 삭막한 겨울 날씨는 약간의 흠이 될 만했지만 더 질질 끌 수는 없었다. 이제 부부가 된 커플은 어느 절차도 생략하지 않았고 그래서 볼 것도 없는 겨울의 크레타로 6박 7일의 신혼여행을 떠났다. 물론 여행지를 고른 건 리시스트라테였다. 6일간 씨시니우스는 리시스트라테를 따라 문화가 융성한 크레타의 박물관이며 미술관에 끌려다녔다. 마지막 하루도 마찬가지였다.

 

“저기가 당신 박사 논문의 배경 아닙니까? 의미 있는 시간이 되겠군요.”

 

“글쎄요, 크레타인은 모두 거짓말쟁이가 맞는 것 같은데…. 여기 봐요. 에피메니데스를 에피스토스라고 써 놨어요. ‘어서 오세요 에피스토스 박물관까지 300미터’.”

 

씨시니우스는 웃었다.

 

“이쪽 지역은 관광객이 별로 안 와서 라틴어라면 다 번역기 돌려서 쓰는 것 같으니까요. 당신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고등학교 때 헬라스어 시간에 늘 졸았으니까….”

 

리시스트라테는 씨시니우스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뭐라고 하셨죠? 죄송해요, 파도 소리 때문에 잘 안 들려서….”

 

“별 얘기 아니었습니다.”

 

   씨시니우스와 리시스트라테는 형편없는 큐레이션을 사십 분만에 둘러보고 나왔다. 마지막으로 기념품점에 들렀는데, 누가 그런 걸 사려고 할까 싶은 꾸벅꾸벅 조는 것처럼 머리가 흔들리는 에피메니데스 인형 말고는 전부 크레타 어딜 가나 같은 도매상에서 찍어낸 기념품밖에 없었다. 그나마 씨시니우스는 기념주화를, 리시스트라테는 우표 한 세트를 샀다. 주차장은 바닷가에 있었는데, 차를 타기 전에 씨시니우스는 잠시 바다를 구경하자고 말했다. 보고 있기에도 진이 빠질 정도로 격렬한 파도였다. 바람 때문에 두 사람의 머리가 엉망이 되었다. 두 사람은 대화하기 위해 거의 소리를 질러야 했다.

 

“리시스트라테! 괜히 여기 오자고 했군요, 사실 바다를 보면서 하려던 말이 있었는데! 사실 제 딴에는 분위기를 잡아 보려던 거였습니다! 일몰을 보면서 평생 기억에 남을 순간을 만들고 싶었는데!”

 

“뭐라고요?”

 

“여행지의 추억을 만들고 싶었다고요! 하지만 이런 데서 사랑한다고 말해 봤자 무슨 낭만이 있겠습니까? 해도 다 떨어져 버렸고!”

 

“추억까지밖에 못 들었어요!”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고요!”

 

“네?”

 

”그러니까 제가 당신을…. 잠깐만, 저는 당신 말이 다 잘 들리는데, 정말 못 들으신 것 맞습니까?”

 

리시스트라테는 역풍을 맞으며 씨시니우스에게로 힘겹게 걸어왔다. 모래에 발이 푹푹 빠졌다. 그는 확실히 들을 수 있는 거리에서 확실히 들을 수 있는 발음과 성량으로 말했다.

 

“여기는 크레타니까요!”

 

씨시니우스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이 거짓말쟁이!”

 

리시스트라테는 목을 젖히며 웃었다. 씨시니우스는 계속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리시스트라테를 따라 웃었다.

 

*

   씨시니우스는 그 후로 17년간의 노력 끝에 마침내 민중을 대표하는 호민관이라는 직위를 직접 요구하여 얻어냈다. 그래서 그는 평민 출신에다 군사적 권한이 전무함에도 일급 지하 벙커에 출입이 허용되었다. 하지만 귀족들은 평민과 귀족 사이의 선을 분명히 그었는데, 호민관에게는 가족을 동반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씨시니우스는 당장 그것에 반대하지는 않았다. 전쟁이 또 터져서 로마가 점령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귀족들이 시민들에게 많은 것을 양보한 만큼 너무 세세한 것들에 꼬투리를 잡지는 않아야겠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웃의 볼스키는 로마를 공격했고 성공적으로 수도까지 불바다로 만들었다. 그는 리시스트라테를 지상에 남겨 두고 지하로 피신했다. 리시스트라테에게는 평민들의 레지스탕스 본부에서 보호를 받으라고 당부하며 방공호에 가 있을 것을 당부했다. 그곳이 얼마나 열악한지 알고 있으면서도.

씨시니우스는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리시스트라테가 포로수용소로 끌려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는 거액의 몸값을 지급했고, 다행히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리시스트라테의 석방 하루 전, 씨시니우스는 수용소에서 온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공식 우편이 아닌 몰래 수용소의 안과 밖을 연결하는 레지스탕스가 전해 준 편지였다.

 

씨시니우스 벨루투스에게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당신이 안전하게 있어서 다행이에요.

저도 안전하게 있어요. 당신의 협상이 먹힌 모양이네요. 소장은 포로들을 인격적으로 대해 줘요. 포로들과 체스를 둘 정도라니까요. 특히 저는 호민관의 아내라 그런지 충분히 대우받고 있어요. 당신은 이제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도 없고, 절 구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어요. 내일이면 저는 풀려날 거예요.

곧 당신을 만날 수 있겠네요.

XXX년 X월 X일

키피시아의 리시스트라테

 

   봉투에는 우표가 붙어 있었다. 처음에 씨시니우스는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는데, 불현듯 공식 우편이 아니라 지하조직 편에서 온 편지에 왜 우표가 붙어 있는지 의아해졌다. 그는 우표를 자세히 들여다봤다. 진짜 우표가 아니라 관광객들을 위한 장식용 우표였다. 크레타 지도가 그려져 있는.

 이 거짓말쟁이. 신혼여행의 마지막 날, 씨시니우스의 의도대로 된 건 아니었지만 리시스트라테는 십칠 년이 지나도록 그 순간을 잊지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닫고 씨시니우스는 비틀거렸다. 이 편지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리시스트라테는 위험에 빠졌다. 리시스트라테는 구조 요청을 하고 있다. 리시스트라테는 자신에게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거라고 작별 인사를 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뭘 할 수 있겠는가? 그에게는 국군통수권도 없고 특수요원처럼 작전을 펼칠 능력도 없었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 보니 씨시니우스는 벙커를 나와서 불구덩이 한복판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법적으로는 대피소이지만 방공호라고 하기에는 볼품없는 지하철역을 찾아갔다. 거기에는 레지스탕스 본부가 진을 치고 있었다. 씨시니우스는 반쯤 정신 나간 사람의 꼴로 레지스탕스의 대장에게 볼스키의 제3 포로수용소가 반인륜적 행위를 하고 있고, 자기 아내가 거기에 갇혀 있으며, 호민관의 직책을 앞세워서, 때로는 호민관의 직책을 내려놓고 그곳을 탈환해야 한다고 횡설수설했다. 대장은 싸늘하게 말했다.

 

“그런 우리도 이미 아는 사실입니다. 호민관님께서 편하게 지하 벙커에서 피해 계실 동안 우리는 이미 우리의 전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우리는 제3 포로수용소를 공격할 계획을 짜 놨습니다. 특히 리시스트라테 동지. 그러니까 당신 아내분께서는….”

 

“잠깐만요, 왜 제 아내가 당신네 ‘동지’입니까?”

 

“모르셨습니까? 리시스트라테 동지가 이번 계획의 핵심입니다. 그분이 소장을 암살하기로 했습니다. 목숨을 걸고 수용소 안의 연락책을 통해서 그분이 자원했습니다. 이제 세 시 십육 분이니, 지금쯤이면 슬슬 진행되고 있겠군요.”

 

씨시니우스는 머리가 띵했다. 뭐가 뭔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제3 포로수용소의 소장은 잔인한 사람입니다. 군인이 되기 전에는 체스선수였는데, 실력이 상당합니다. 그래서 포로들에게 자신을 체스로 이기면 석방, 지면 사형이라는 조건을 걸고 내기를 합니다. 당연히 소장이 이깁니다, 어떻게 아마추어가 프로를 이기겠습니까. 그래도 그는 그걸 즐기는 겁니다. 생의 극한에 내몰려 자신에게 도전하는 사람들과 승부를 벌이는 것을. 리시스트라테 동지는 오늘 그의 상대로 뽑혔습니다. 로마의 지성이니 체스도 잘할 거랍니다. 우리는 소장이 체스에 집중하고 있을 때 독 주사기를 써서 그를 암살하기로 했습니다.”

 

씨시니우스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하지만 그러면 즉결 처형일 것 아닙니까?”

 

대장은 고개를 저었다.

 

“아마 볼스키군은 리시스트라테 동지의 배후에 있는 레지스탕스의 정보를 캐고 싶어 할 겁니다. 로마 측 고위 관료를 유인하고 싶을지도 모르고, 그러니까 호민관님을 말하는 겁니다. 적군이 동지를 살려 두는 동안 우리가 그를 빼내러 갈 겁니다.”

 

씨시니우스는 돌처럼 굳어 버렸다. 리시스트라테를 살려둘 거라는 것은 추측에 불과했다. 그리고 설령 정말로 그를 살려둔다고 해도, 정보를 캔다는 것이 뭘 의미하는지는…. 그는 악에 받쳐 욕설을 지껄여댔다. 리시스트라테가 무슨 일을 겪을지 알면서 그런 임무에 밀어 넣은 거냐고, 그러고도 당신들이 사람이냐고, 처음부터 구조 작전을 할 생각도 없는 건 아니었냐고.

 

“씨시니우스 호민관님, 정신 차리십시오. 우리는 전쟁 중이고 리시스트라테 동지는 군인입니다. 모든 것은 그분의 결의였습니다.”

 언제나 영원히 모를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씨시니우스는 정신이 돌아온 듯했다. 그는 제법 침착한 사람처럼 말했다.

 

“저도 갈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구조 작전 말입니다. 병력이 많을수록 좋지 않겠습니까?”

 

“훈련되지 않은 사람은 곤란합니다.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는 자리인 만큼….”

 

“역시 구조 작전이 있다는 건 거짓말이었군.”

 

   씨시니우스는 주머니에서 권총을 찾았으나 본부로 오면서 몸수색 도중 압수되었다. 그는 자기 옆에 있는 조명기를 대장에게 집어 던졌다. 그는 경호 받으면서 쫓겨났다. 권총은 돌려받지 못했다. 본부 밖에서 그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그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지하 벙커로 돌아가려던 찰나, 지하철역 입구와 통하는 광장에서 함성이 들렸다.

 

전쟁이 끝났다!

씨시니우스가 평화협상이 성공적으로 체결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

   로마 국군은 연말에 정기적으로 수여하는 무공훈장을 리시스트라테에게 주기로 했다. 철학 교수가 체스 시합을 미끼로 잔혹한 수용소장을 암살한 일화는 그 전부터 대중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고, 귀족들도 분열이 심각한 계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번 수상자는 리시스트라테로 결정했다. 사실 전쟁 중 로마는 볼스키에게 일방적으로 밀리는 쪽이었기 때문에 따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낸 정규군이 없기도 했다. 그러나 수여식 당일, 리시스트라테는 일언반구도 없이 행사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당시 사령관이었던 코미니우스는 씨시니우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씨시니우스는 리시스트라테가 행사장에 도착해 있는 줄 알았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어디에서도 리시스트라테를 찾을 수 없었다. 그날 리시스트라테는 새벽 한 시가 되어서야 집에 돌아왔는데, 어디 있었냐고 다그쳐 묻는 씨시니우스에게 그는 산책했다는 얘기만 하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씨시니우스는 노크도 없이 방문을 활짝 열고 들어가서 당신의 행동은 로마를 모욕한 것이고, 그게 당신의 명예뿐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 커리어에도 돌이킬 수 없는 얼룩으로 남을 거라고 말을 쏟아냈다. 리시스트라테는 짜증스럽게 씨시니우스를 응시했다.

 

“당신이 지하로 도망치기 전에 제게 마지막으로 한 말이 뭐였죠?”

 

씨시니우스는 말문이 막혔다.

 

“살아만 있어 주면 다 괜찮다고 했잖아요. 씨시니우스, 당신은 그 이상을 바랄 자격이 없어요.”

 

씨시니우스는 뭔가 말하려다 이내 리시스트라테의 말이 옳다는 것을 인정했다. 씨시니우스는 리시스트라테가 진지한 반전주의자라는 것을 알았고, 이런 식으로 자신의 행동이 이용당하는 것이 그에게 어떤 의미일지 이해했다. 그러나 그는 잠시 후 제법 무게를 잡고 이런 질문을 했다.

“그러면 당신은 제게 무엇을 바랍니까.”

리시스트라테는 말했다.

 

“아무것도. 이제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그럼 제가 살아 있기를 바라지도 않는다는 뜻이겠군요. 당신이 제가 죽어도 아무렇지 않다면 저는 제법 서운합니다.”

 

“말장난하지 마세요, 오늘 충분히 힘든 하루였으니까 저 그만 괴롭히고 가서 주무세요. 내일 중요한 연설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씨시니우스는 순순히 문을 닫고 나갔다. 잠은 오지 않았다. 다음날 그는 광장으로 나갔지만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씨시니우스가 서 있어야 할 연단에는 레지스탕스 대장이 서 있었고, 그는 발언하기 위해 올라온 씨시니우스에게 “씨시니우스 벨루투스를 민중의 이름으로 추방한다. 오늘 해가 떨어지기 전에 로마 성벽 밖으로 떠나지 않는다면 타페이아 절벽 밑으로 던져 버릴 것이다.” 하고 엄숙하게 말했다. 그의 죄목은 그가 로마 내에서 일으킨 일련의 정치적 소요가 전쟁의 빌미가 되었다는 것, 그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전쟁 소식을 미리 알고 있었음에도 언론을 탄압한 것, 그리고 시민군 대장에게 램프를 집어 던진 것이었다. 시민들은 흘린 가족의 피에 대한 제물을 바치고 싶었고 씨시니우스는 그 후보 중 하나였다. 지금까지는 전쟁영웅 아내의 명성이 그를 지키고 있었다. 씨시니우스는 그 방패의 단단함을 잃고 나서야 실감했다.

 

   분노한 민중들이 씨시니우스를 뒤쫓았다. 그는 겨우 주차장까지 가기 위해서도 소리를 지르며 오늘 안에 로마를 빠져나가려면 차에 타기는 해야 하지 않냐고 설득해야 했다. 누군가 소리쳤다. 추방은 사형이야, 멍청아. 맞는 말이었다. 로마에서 추방은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 사람으로 선포를 당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추방자의 반은 로마를 빠져나가기 전에 암살당한다. 씨시니우스는 차를 타고 곧장 국경을 나서는 대신 믿을 만한 정치적 파트너 마르쿠스와 접선했다. 그들은 연락 끝에 컨테이너로 된 도시 외곽의 폐창고에서 만나기로 했다. 씨시니우스는 창고에서 리시스트라테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신음이 길게 이어졌지만 리시스트라테는 받지 않았다. 포로수용소에서 소장을 암살한 후 평화조약이 포로 석방까지 이어지는 동안, 리시스트라테를 붙잡은 볼스키군은 상해가 남을 만한 고문을 한 건 아니지만 처음 몇 날 동안 잠을 재우지 않았다고 했다. 그 이후로 리시스트라테는 집에 있을 때 틈만 나면 절대 깨어나는 법이 없는 낮잠을 길게 자곤 했다. 씨시니우스는 음성사서함에 메시지를 남겼다.

 

“리시스트라테, 저는 왕정 철폐 시위부터 함께해 왔던 믿을 만한 동료의 집에 피신해 있습니다. 도청의 위험이 있어 어디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저는 망명을 떠날 겁니다. 저는 서류상으로는 죽고 새 신분을 얻을 겁니다. 제 동료가 그런 쪽으로 잘 아는 사람을 소개해 준답니다. 벌써 우리는 제가 씨시니우스 벨루투스로서 언제 어떻게 죽을지 전부 정해 놨습니다. 아, 어디서 죽을지도요. 힌트를 드리자면, 당신이라면 제 부고를 봐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곳이 제 공식적 사망지가 될 겁니다.”

 

*

   “…마르쿠스는 배신자였어요. 위장 사망이니 가짜 신분이니 하는 것은 전부 저를 유인하기 위한 거짓말이었습니다. 사실은 저와의 연결점을 빨리 청산하기 위해 반역자를 처단하려고 했죠. 하지만 살인에는 서투르더군요. 몸싸움 끝에 그의 권총을 빼앗아 쐈습니다. 그다음부터는 당신도 알고 있겠군요. 저는 혼자서 로마 국경을 빠져나왔습니다. 마르쿠스의 차를 타서 미행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브린디시 항으로 가서 이구메니차 항까지 화물칸을 타고 갔고, 코린토스 만은 보트를 타고 건넜죠. 아테네에서 스파이를 따돌린 건 사실인데 그게 다섯 명이나 됐는지는 몰랐습니다.”

요원은 씨시니우스가 떠들게 두었다. 혹시라도 쓸모 있는 정보를 뱉을까 싶어 지금까지 그의 넋두리를 내버려 두었지만 알맹이 있는 이야기는 없었다.

 

“그래서 크레타에 온 거예요? 아내한테 당신 죽음을 거짓으로 믿게 하려고?”

씨시니우스는 대답했다.

 

“처음에는 살기 위해 도망쳤습니다. 사실 아테네에 정착할 수만 있다면 정착했을 겁니다. 하지만 정부는 제게 체류는 허락했으나 시민권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저를 보호할 의무가 없다고 했고, 그럼 어차피 저는 여기서 언젠가 당신 같은 스파이의 손에 죽을 목숨입니다. 평생 쫓기면서 목숨을 부지하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역시 안 되겠습니다. 언제나 제게 주어진 세계는 로마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리시스트라테를 속이는 것이 진정 그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저를 위한 것인지 헷갈리지만, 어쨌든 그게 제가 가질 수 있었던 유일한 목적이었습니다. 이제 당신이 해야 할 일을 하시죠. 저는, 솔직히 말해 준비된 건 아니지만, 할 말을 다 했으니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요원은 더 이상 서글서글한 택시 기사가 아니었다. 그의 얼굴은 어떠한 표정도 띠지 않았고 그는 청부살인업자에게 어울리는 어조로 질문했다.

“확신하세요? 마지막으로 기회 드립니다. 더 하고 싶은 말 없어요?”

생의 극한에 다다른 자의 마지막 한 마디는 때로 번뜩이는 정보를 담을 때가 있어 이런 매뉴얼이 생겼지만 희생자들은 주로 이것을 자비의 발현으로 착각하곤 했다. 그래서 씨시니우스도 요원으로서는 전혀 필요 없는 한 마디를 내뱉었다. 말하기도 부끄러운 두려움을.

“모든 게 계획대로 됐는데 정작 지금 드는 생각은 말입니다, 그 사람이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다면 속상할 것 같습니다.”

자동차 안이 가스로 가득 차기 전에, 요원이 방독면을 쓰기 전에, 그리고 엑셀에 고정장치를 올려 놓은 자동차가 달리는 도중 문을 열고 영화처럼 빠져나오기 전에, 그리고 씨시니우스를 박살 난 자동차의 운전석으로 옮겨 놓고 모든 것을 사고로 위장하기 전에, 요원은 무심하게 말했다.

“당신도 참 모순적이군요.”

   요원은 증발하는 것처럼 현장에서 사라진다. 크레타 시민과 경찰들이 씨시니우스의 시신을 발견하고, 부검의가 시체가 추돌 전 이미 가스 중독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이 수상하다며 보고하고, 수사팀장이 추방당한 로마인이 암살당할 때는 쉬쉬하는 게 원칙이라며 질책하고, 뉴스에 씨시니우스가 크레타의 고속도로에서 사고로 죽었다고 보도된다.

 리시스트라테는 그 뉴스를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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