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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한 때의 추억

청려장

한 해의 끝에서 해안을 걷는다.

내 곁에는 당연하게도 네가 함께 있고.

이미 까맣게 물든 하늘은 그 밑의 바다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둡게 만들고, 불규칙적으로 들려오는 파도 소리는 네가 흥얼거리는 노래의 반주로 둔갑한다.

과연 아이돌이라는 것처럼 흠잡을 데 없는 노랫소리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소란한 마음을 단숨에 진정시키고, 해변의 모래를 밟으며 신난 발걸음을 옮기던 네가 가끔씩 날 돌아보고 환한 미소를 지을 때마다 나는 얼마큼의 시간이 흘러도 이 순간을 잊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청장, 어떻게 너 같이 사랑스러운 사람을 만났을까.

네게는 이번이 나와 함께 온 처음일 텐데도, 너는 우리가 함께했던 곳마다 마치 '그때'를 기억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줘서.

그 행동이, 마치 죽음 따위는 없었다는 듯한 착각까지 불러일으켜 멍청한 실수를 할 뻔한 게 몇 번이나 반복됐었는지.

모르겠다. 더 이상의 변수는 제거하겠다던 내가 매번 너라는 변수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도, 너를 향한 이 감정이 사랑조차 맞는지도.

아니, 이 감정을 고작 사랑이라 칭해도 괜찮을지도.

몇십 번의 반복되는 죽음 속에 다시 시작되는 너와의 만남은 이 반복되는 일상의 유일한 기쁨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긴 이별을 하고서 또 그 기쁨을 누리겠지.

또다시 너를 만나 인사를 건네고, 다시 한번 변수인 너를 제거하려다 실패할 것이다.

며칠 후면 실패할 지금의 그룹, 재시작 전의 잠깐의 배회.

네게 솔직할 수 있는 건 언제나 지금뿐이다.

이제 와서는 지나간 어느 회차에서처럼 가깝지는 않아도, 언제나 네게 산책을 권하면 너는 그것을 화사하게 웃으며 기쁘게 받아들인다.

곧 끝나버릴 이 세상을, 이 시간을 영원인 것처럼 느끼며 너와 함께하고 싶다.

뒤탈 걱정 없이 오로지 네게 사랑한다 고백할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을.

청장, 나의 영원, 나의 순간.

많은 것이 무뎌진 지금에 이르러서는 너만이 내 자극이고 진심이라,

이제 나는 어떤 이해받지 못할 관계로라도 네 곁에 있을 수 있다면 상관없이 느껴졌다.

네 곁에 있을 수 있는데 그런 사소한 게 무슨 문제일까.

어쩌면 네가 꺼림직하게 느낄지도 모를 생각을 지우지도 않은 채 지금의 네 모든 순간을 눈에 담는다.

언제든 지금의 너를 떠올릴 수 있게. 언제든 지금으로 돌아온 것 같은 착각을 느끼도록.

앞으로 몇십, 몇백 번의 삶을 반복할지 모를 생에 유리 덮개 속 한 송이의 장미처럼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 고백은 않고서 겨울 바다를 거니는 한 쌍의 연인과 같은 지금을 닳고 닳을 그때까지 너를 기억할 것이다. 사랑할 것이다.

이 파도 소리가 그친 후에도 계속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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