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겨울바다
연수미진
-1-
- 쏴아-.
겨울 바닷바람의 차갑고 짭조름한 향(한동안 맡았던 먼지와 불 그을린 내, 피비린내와 썩어가는 살내음과는 다른 충족감이 드는 향이었다)이 그간의 것들을 밀어내고 폐부에 가득 들어찼다.
"언니, 여기 앉아봐 봐."
입고 있던 학교 교복 자켓을 벗어 백사장 위에 펼쳐 두곤 언니의 손을 잡아 끌어 앉혔다.
"우리 여기까지 오기 진~짜 힘들었다. 그렇지?"
오랜만에 마주 본 언니의 두 눈동자는 그간의 일들을 증명이라도 하듯 처음의 생기 넘치던 대장부의 눈은 어디로 가고 탁한 빛을 띄고 있었다. 나는 그런 언니를 바라보며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 사실 엊그제 우리 여기 처음 도착했을 때만 해도 너어무 힘들었는데 어제, 그리고 오늘 언니랑 이렇게 생각 정리를 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 후련 해진 것 같아. 여기까지 오느라 언니도 힘들었을 텐데 나랑 함께해줘서 정말 고마워.”
손을 옆으로 뻗어 언니의 손을 그러쥐었다. 전보다 많이 투박해지고 피로 얼룩진 손이었지만 여전히 내가 제일 좋아하는 언니의 손이었다. 내가 갑자기 손을 잡을 줄 몰랐다는 듯 언니는 우리의 손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 집요한 시선을 피해 뒤쪽의 아직도 환히 불타는 쉘터를 한 번. 친구들을 한 번.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바다를 바라보았다.
“여기까지만 오면 우리 모두 행복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래서 그 누구 하나 빠짐없이 모두 여기까지 데려온 건데 이제 다 끝이네... 그치?
나는 대답을 기다리며 물었다. 그러나 대답이 없는 언니를 바라보자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다름아닌 마치 동화 속 도깨비의 모습처럼 화를 내는 언니의 표정이었다. 나는 그 모습이 너무 이 사람다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돌아오는 답 대신 내가 먼저 운을 띄웠다.
“아하하, 지금 나답지 못하다는 거지? 아, 웃기다. 여전히 내가 아는 우리 언니라 너무 좋아. 그렇지만 언니를 만나기 전의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는걸… 언니는 모르겠지만. 금방 좌절하고, 포기하고, 불합리함에 순응하면서. 하하, 그렇게 보지 마. 그걸 언니가 개과천선 시켜준 거야. 이젠 그냥 옛날 이야기일 뿐이지만. 아! 기억나? 우리 예전에 바다 가자고 했던 거. 민재가 합숙 취소된 거 너무 아쉬웠다니까 언니가 그랬잖아. 다 같이 가면 되지 뭐가 문제냐고. 아아~ 그때 다 같이 못간 바다 여행이 너무 아쉽네. 여름 바다는 어떨지 나 너무 궁금한데…”
실없는 소리를 하며 여전히 고고하게 몰아치는 저 어두컴컴한 바다를 바라보았다.
“미련하지? 이제 와 계절을 돌아 여름 바다를 맞이한다 해도 그때와 같진 않을 텐데.”
-2-
“자, 기억이란 무엇일까? 누가 대답해볼 사람?”
“…야, 야!”
“…”
“아씨, 야아! 이거 좀 봐봐.”
고등학교 진학 후 첫 경시대회를 준비하느라 담당 선생님께도 특별히 양해를 구하고 공부 중이었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저 끈질긴 짝궁 놈(이지욱, 2학년 이나연의 동생이자 초등학교 졸업 이후 만남이 적어진 터라 서먹할 법도 하건만 기어코 내 옆으로 자리를 옮겨 앉은 불알친구)가 보낸 쪽지를 펼쳐보았다.
-우리 바다 갈래?
-야, 나 지금 경시 준비 중이잖아 ㅡㅡ 안보여? 근데, 갑자기 웬 바다?
-우리 양궁부 여름 합숙하는데 이번에는 바다를 간다더라고.
-내가 너네 부 합숙을 왜, 아니 어떻게 따라가. 안 가.
-아니 우리 집 쩐주가 아버지가 나 이번에 양궁부 들어갔다고 학교에 발전기금을 더 냈다나? 내가 코치님이랑 다 얘기했다니까? 어? 가자~~~ 니가 좋아하는 장하리 선배도 있는데? 응? 응응응? 제바아아아아알!!!
쪽지만으로도 시끄러운 녀석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종이를 고이 접어 필통 안으로 집어넣었다. 중학교와 달리 학년 간의 교류, 특히 3학년과 1학년간의 교류가 크지 않은 고등학교 생활에서 일면식 없는(솔직하게 말하자면 일방적인 존경을 하고 있는) 3학년 선배를 만날 수 있다는 건 흔치 않은 기회이긴 했으나 양궁부원도 아닌 내가 따라가는 것은 여러모로 민폐일 게 틀림없었다. 물론 그 선배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내 옆 원수는 내 단호한 성격을 아는지라 잠시간 꿍얼거릴 뿐 이내 책상 위로 엎어져 잠을 청했다. 이미 흐름이 끊긴 공부, 다시 시작하려면 할 수 있었겠으나 머리도 식힐 겸 수업내용에 집중했다.
“기억…이라.”
-기억… 죽음…?
-3-
“그땐 왜 갑자기 죽음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는지 모르겠어. 근데 여기까지 오고 나니까 뭔가 알 것 같기도 하고 그러네.”
누군가가 죽는다는 것은 더 이상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쓰이지 않는다는 것. 이걸 반대로 생각해보면 기억되지 못한다는 건 죽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럼, 내가 이젠 더이상 기억하지 못하는 저 너머의 과거는 내가 죽여버린 과거의 나인 것일까? 그래서 이 수많은 과거의 잔상들은 자신을 죽이지 말아 달라며 더욱 처절하게 내게 얽혀오는 것일까?
아, 그렇기에 과거는 저 겨울 바다만큼 어둡고 깊으며 시린 것일지도.
-4-
“지금부터 제311회 효산 여자중학교 졸업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야, 기생수! 우리 내년에도 같은 반이더라? 우리 올해보다 더 친해지자?”
하도 다양하고 빈번하게 시비를 걸던 터라 이젠 별로 상대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무리들이 철문을 있는 힘껏 닫고 나가자마자 옥상에 드러누웠다. 추운 날씨 탓에 자잘한 타박상들이 즐비해 있는 등이 아려 왔지만 마음만큼 아린 것은 아니었기에 그냥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다 내려가면 아무도 마주치지 않고 조용히 하교할 수 있을 것이다.
“등신”
어이없음에 눈이 번쩍 뜨였다. 아무리 평소에 자주 듣는 말이더라도 혼자 있는 줄 알았던 곳에서 들으니 더욱이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소리의 근원을 찾아 자연스레 고개를 돌렸다. 초면에 다짜고짜 욕을 뱉는 이는 옥상 문 위에 조그마한 턱에 어디서 찾았는지 사다리를 기대어 두고 올라 앉아 학생이라면 입에 대지 않을 물건을 빼어 문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 말이야. 이 등신아. 굼벵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데. 넌 굼벵이만도 못한 등신이냐?”
굼벵이가 아니고 지렁이겠지. 내뱉지 못한 말을 속으로 삼키며 빤히 바라봤다.
“니가 그렇게 가만히 있는다고 쟤들이 그만둘 줄 아냐? 그 상태로 3년 내내 버티려고? 미련하다. 미련해. 아 됐다. 내가 뭐라고. 니 인생인데 알아서 잘 살아라.”
“근데 니가 걔네보다 꿇릴 것도 없어. 너 그거 아냐? 그 천재? 상 받는다고 학교에 플래카드도 걸리고 그러던데. 나도 니 얼굴은 아는데 아까 걔들은 누군지도 몰라.”
자기도 말이 왜 이렇게 길어지는지 모르겠다며 머리를 거칠게 털어내곤 자리를 털고 일어난 그 사람이 어느 정도 높이도 있어 보이건만 자기가 있던 자리에서 가볍게 뛰어내려와 마주 섰다.
“야, 그냥 참는다고 감정 소모 안 하는 거 아니다. 그게 오히려 더 클지도 몰라.”
나에 대해 뭘 안다고 떠드는 꼴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묘하게 맞는 말인지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렇게 몇 초간의 정적이 흐르고 내 눈에 보인 건 땅바닥에 떨어진 네모난 명찰 하나였다. 푸른색 배경에 하얀색 글씨로 쓰인 플라스틱 명찰.
“박, 미진…”
“인제 보니 굼벵이가 아니고 벙어, 야! 그거 이리 내놔! 그거 민지 줄 건데!”
“아.”
“어, 야? 괜찮냐? 그러니까 누가 남의 물건을 아니, 아씨. 미안.”
검지 손가락에 피가 방울져 맺히기 시작했다. 명찰이 오고 가는 과정에 있어서 생채기가 생긴 것이었다. 따끔하긴 했지만 그렇게 크게 다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자신이 다친 것 마냥 호들갑을 떨어 대기 시작했다.
“야, 이거라도 받아.”
오늘 처음만난 사람이건만 날 왜 이리 어이없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내 손에 쥐어진 건 밴드도 뭣도 아닌 교복 자켓 단추 하나였다.
“이게 뭔,”
“아니… 그 뭐냐? 그런 거 있잖아. 졸업식 날 교환하는 단추 뭐 그런 거. 두 번째 단추는 친구의 건강을 기원하는 거래. 내가 데일 밴드도 없고 아 몰라. 걍 받아. 미안.”
말하면서도 부끄러운지 새빨개진 얼굴로 황급히 철문을 닫고 빠져나갔다. 나는 멍하니 손에 쥐어진 단추와 철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자자, 너희에게 지금 제일 중요한 것은 입시겠지만 가끔 이런 철학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답해보는 것도 정말 중요하다. 그럼, 오늘 주제에 대해 보고서를 쓰고 다음시간에 한 명씩 돌아가면서 발표하는 거로 하자. 이상! 자, 반장. 인사!”
선생님의 말씀에 깊이 묵혀뒀던 상념에서 깨어나 인사했다. 주머니 속에서 작고 동그란 물체를 꺼내 책상에 올려두었다. 그간 힘든 일이 있거나 그 사람이 생각날 때면 하도 만지작거려 제 기능을 못하는(이미 자켓에서 떨어져 나온 그날부터 제 기능은 하지 못했겠지만) 단추였다. 이제는 이걸 준 이의 얼굴도 가물가물하였는데 그 빨갛게 물들었던 모습만은 또렷하게 기억이 났다. 짧은 울프컷 정도로 보일만한 머리 기장에 거친 말투를 쓰고 얼굴이 토마토처럼 붉어진 그 모습이 참 귀여웠는데 마치 저기 복도에 저 사람처럼…
“어?”
-쿠당탕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의자가 뒤로 넘어가 나뒹굴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은 전혀 머리에 입력되지 않았다. 지금은 은연중에 매번 기다리던 그 사람과 나 둘만이 한 공간에 남겨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다시 눈앞에서 사라지기 전에 붙잡아야겠다는 생각에 뒷문을 열고 뛰쳐나가 손을 붙잡았다.
“언니!”
-5-
“언니.”
그때처럼 언니를 부르고 눈을 맞추었다. 입에 물려있던 재갈을 벗겨주곤 언니의 어깨에 기대 누웠다.
“나는 있지. 그때 언니를 만나서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언니는? 언니도 기뻤어? 그랬을까?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까 언니 목소리 다시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이 사태가 벌어지고 벌써 반년이 지나가는 동안 한 번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 볼을 타고 어깨로 흘렀다.
“아, 처음은 아니었나? 그때 남라 언니를 그렇게 몰아세우지 말걸. 지도 같은 처지인 주제에.”
팔에 여기저기 물어뜯긴 자국들을 바라보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활활 타오르던 쉘터의 화마가 모든 걸 집어삼키고 꺼지자 빛은 오로지 바다 위에 부서지는 달빛뿐이었다. 사람 두 명 정도의 인영이 물 위로 비쳤으나 이내 아래로 꺼졌는지 사라지고 없었다. 겨울바다에는 간간히 들려오는 사람 아닌 자들의 울음소리와 네모난 플라스틱 조각 두 개가 꽂혀있는 자켓만이 모래사장에 나뒹굴었다.
-6-
“다시 누군가 우리를 기억해서 우리 이야기를 적어 내려가 줄 때. 그때 우리 다시 살아서 만나자. 언니 사랑해.”
